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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군의 취미/L군의 에세이

[에세이] 시발비용 혹은 멍청비용 혹은 홧김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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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릉, 따르릉'

엄마한테 걸려온 전화 한 통!

이 시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오는 것은 전화를 받지 않아도 용건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택배가 왔는데, 카메라 같은데?!"

엄마의 목소리는 약간의 의아함은 있지만 근 30년간 아들이 벌여온 사건들을 생각한다면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네 엄마, 이번 주말에 가서 사용할 거예요. 잘 놓아 주세요."

나의 쇼핑은 항상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며칠 전 50만원 짜리 카메라를 덜컥 구매해버렸다. 

평소 사진을 자주 찍는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사려고 계획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물건은 무엇인가 생각해본다. 

 

지난주 월요일 갑자기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몰려왔다. 

스트레스가 없었던 적이 있었겠냐만은 그날은 유달리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현실도피책으로 '요즘 유행하는 유튜브 영상이라도 찍어볼까?, 아니면 말고!'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검색 포털에 들어갔다. 비어있는 검색어에 '유튜브 입문용 카메라'를 검색했고 구매를 누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결정은 오롯이 카메라 색깔이 흰색이냐, 검은색이냐를 놓고 고민한 것이다. 평소에는 신중하다가 이럴 때 나오는 실행력은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최근에 이런 소비패턴을 가리키는 말이 나왔는데 '홧김비용'이라고 한다.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지출하게 된 비용을 말한다. 그래도 그렇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50만원 짜리 카메라를 5분 안에 구매한 건 너무 한 것이 아닌가. 내가 가진 스트레스의 확고함을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주말에 집에 내려가서 택배 상자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상이나 무엇을 열심히 하겠다는 나의 열정은 다소 사라진 상태였다. 카메라를 집어 들고 친구와의 약속장소로 이동한다. 카메라는 내가 샀으니 우리 같이 영상을 찍어보자고 친구를 설득할 참이다. 카페에서 2시간의 브레인스토밍이 이어졌다. 브레인스토밍을 할 때 비판 없이 아이디어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배웠다. 하지만 친구나 나나 서로 의견을 내면 바로 단두대에 세워 공개처형 시켰다. 그렇게 영상을 찍어보겠다는 나의 의지는 친구를 만난 지 2시간 만에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관심을 가지려면 그만큼 시간을 들여야 한다. 관심과 시간을 들인 쇼핑도 방구석 한쪽을 차지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내 홧김비용으로 구매한 카메라의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다. 쇼핑에도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50만원의 비용은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쯤 쇼핑에 만족을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내가 내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답은 이번 쇼핑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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